여자 빨치산 조경순, 그녀는 아직 살아 있을까?

[정병진 기자] 여순항쟁 당시 여수14연대 봉기를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은 김지회 중위(1925. 3. 25~1949.4.)이다. 그는 아내 조경순(趙庚順, 1930. 6. 21~?)을 데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벌였다.

김지회는 이북지역 함경남도 함주군의 삼태마을 출신이고 일제강점기부터 하사관 생활을 하던 군인이다. 조경순은 제주 출신이고 일제강점기 대판(오사카)에서 고등여학교 3년에 재학 중 해방이 되자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해 광주의대 부속 병원 간호사로 일하였다.

조경순에 따르면 두 사람은 1948년 6월경 광주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 간호사와 환자로 처음 만났다. 당시 김지회 중위는 심장염으로 3개월간 입원하였는데 그 사이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하였다.

조경순은 둘의 애정이 깊어졌을 무렵에야 김지회가 공산주의자임을 알았다고 한다. 김지회에 대한 애정과 사상 사이에서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지만, 애인을 포기할 순 없었다. 두 사람은 서울에 머물던 조경순 부친을 찾아가 결혼 허락을 구하였다.

조경순의 진술에 의하면 그의 부친도 김지회가 공산주의자임을 알았던 모양이다. 조경순은 자신의 부친은 ‘독실한 예수교 장로라는 지위에 있어서’ 두 사람의 결혼을 완강히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동광신문> 보도에 의하면 조경순의 부친은 ‘장로’가 아닌 ‘목사’였다. 조경순 부친은 “김지회가 공산주의 사상을 버리고 독실한 신자로 새 출발을 약속하면 허락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이에 김지회는 공산주의 이념을 버리고 독실한 신자가 되기로 다짐하여 결혼 허락을 얻어냈다. 아마 두 사람이 혼례를 치르기 직전 여순항쟁이 터진 거 같다.

조경순은 김지회가 부친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자신을 공산주의의 길로 이끌었고, 이 때문에 불행한 삶이 이어졌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도 김지회의 길이 옳지 않다고 마음으론 생각하면서도 정에 이끌려 그를 따랐다고 덧붙였다. 조경순은 남편 김지회를 따라 지리산에 입산하기에 이르렀다.

토벌당국은 김지회와 조경순의 존재를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호남지방작전 사령부는 1948년 11월 5일 김지회 부부를 체포한 자에게는 일금 50만원, 사살하는 자에게는 25만원을 주겠다며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기까지 하였다. 1948년 쌀 한 가마니(80kg) 가격은 600원가량이었으니 50만 원이라면 오늘날 화폐 가치로 치면 족히 수억 원 이상은 되지 않을까 싶다.

1949년 4월 9일, 토벌 과정에서 김지회는 사살되었고 조경순은 남원 산내면 달궁마을에서 생포되었다. 조경순은 체포 과정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었는지 당시 신문 보도 사진을 보면 구부린 자세로 서 있다.

토벌 당국은 조경순을 선무공작에 활용하였다. 조경순은 5월 중순부터 진주극장, 여자중학교 등지를 돌며 자신의 빨치산 활동에 대해 참회담을 들려주는가 하면 방송에 나가 봉기군들에게 투항하도록 독려하는 선무활동을 벌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북 남원에 전리품 시찰차 들렀을 때 조경순을 만난 적도 있다.

하지만 10월 29일 고등군법회의 공판에서 검찰은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생포된 조경순, 유진오, 홍순학, 유호진에게 총살형을 구형하였다. 이같은 구형이 내려지자 조경순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다행히 그는 총살되진 않았다. 군법회의 군보도과는 11월 7일 “상부의 신중한 심사를 거쳐” 조경순 등에 대해 감형키로 하였다고 발표했다. 조경순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거기서 생을 마쳤다고 알려졌다. 과연 사실일까?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는 조경순이 투옥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고 말한다. 그 근거는 조경순은 전향하여 선무공작 활동을 하였는데, 이처럼 선무공작을 한 사람 중에 투옥된 경우는 사례가 거의 전무하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 헌터>를 만든 조성봉 감독은 ‘그녀, 조경순’이란 글에서 조경순의 조카(조성봉)에게 들은 새로운 증언을 전한다. 조경순은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6.25 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해 석방되어 월북하였다. 이 같은 소식이 일본 친지들을 통해 전해졌지만, 지금은 소식이 끊겨 생사를 알 수 없다고 한다.


퇴정하는 조경순 고등군법회의 재판정에서 퇴정하는 조경순 ⓒ 동아일보(1949. 10. 1) 캡처

조경순의 부친이 ‘목사’가 분명하다면 그는 누구일까? 당시 활동하던 제주지역 목사 중에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은 ‘조남수 목사'(1914-1988)가 거의 유일하다. 조남수 목사는 4.3 당시 입산한 무장대들에게 선무공작 활동을 펼쳐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건져냈고 반공의식이 강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조 목사는 10세 때인 1925년 일본으로 건너오라는 부친의 편지를 받고 일본 오사카에 건너가 거기서 고등소학교부터 상업학교에 이르기까지 공부하다가 귀국하였다. 하지만 그의 가계도에는 ‘조경순’이란 딸 이름이 올라 있지 않다. 다만 조 목사의 부친 조**(1890-1962)의 후처(강**, 1917)에게 3녀가 있었다고 나온다. 그들 중 한 명이 조경순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 해도 조경순이 1930년생이라면 나이가 잘 맞지 않는다.

제주의 향토사학자 김인주 목사는 “조경순은 조남수 목사의 딸일 가능성 90%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조경순의 나이를 비춰보면 조남수 목사 부친의 후처가 낳은 딸이 아니라 조남수 목사의 딸이어야 맞다는 것이다.

더욱이 조경순의 호적상 주소(제주시 조천면 1618)는 조남수 목사의 큰 딸이 자신의 부친이 살던 곳이라 지목한 적 있는 제주시 한경면 조수리 지번과 일치한다고 하였다. 김인주 목사는 당시 신문에 보도된 ‘조천’이란 명칭은 ‘조수'(造水)의 물 수(水)자를 기자가 오독해 잘못 쓴 걸로 보인다고 설명하였다.

더 면밀히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조경순이란 인물은 매우 흥미롭다. 4.3항쟁이 발생한 제주 출신 중에 여순항쟁에 참여한 인물이기도 하고, 기독교 신자로서 애정과 이념 사이에서 고뇌하다가 애인을 택해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살아남은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의 조카의 증언대로 조경순은 월북해서 지금도 살아 있을까?

※ 참고자료
제주노회, <제주기독교 100년사>(2016)
주철희, <불량국민들>(북랩, 2013)
경향신문, “이용운과 조경순(김지회의 처) 등 9명 총살 언도”(1949. 10. 2)
동광신문 “반도수괴 김지회 애인 조경순은 이러한 자다” (1948. 11. 23).
동아일보, “유진오 등에 총살 구형” (1949. 10. 1)
조선일보, “애정과 사상” (1949. 5. 1)
조성봉, ‘그녀, 조경순'(http://t2m.kr/YLVt1)

정병진 기자 naz77@hanmail.net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카테고리:여순항쟁, 정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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