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전후 ‘장성 남창골’ 집단학살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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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전후 장성 남창골 집단학살 사건을 증언 중인 김복수씨 ⓒ 정병진

[정병진 기자] 한국전쟁 전후 전남 ‘장성 남창골에서 적어도 수백 명이 (당시) 경찰에 의해 집단학살됐다’는 증언이 새롭게 나와 주목된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화위)가 2008년 하반기에 펴낸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전쟁 전후 경찰에 의한 담양·장성지역 민간인 희생자 규모는 신원이 확인된 사람만 57명이다. 더욱이 남창골의 대규모 민간인 학살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다.

기자는 지난 9월 30일 오후, 장성 대방마을 최고령자인 김복수(89)씨를 만났다. 그 마을에 살다가 1949년 4월 여순항쟁 여파로 장성 경찰에 끌려가 즉결 처형당한 외조부(송영옥, 26세)에 대한 자세한 증언을 채록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김복수씨는 내 외조부와 이웃집에 살았고 그를 기억하는 거의 유일한 생존자다.

김씨는 한국전쟁 직전 대방마을 이장이던 외조부가 빨치산과 관련 없음에도 억울한 죽임을 당했음을 기억을 더듬어 증언해 주었다.

이어 그는 “한국전쟁 전후 대방마을부터 약수리 일대에 이르기까지 족히 수백 명에 이르는 사람이 장성 남창골에 끌려가 경찰에 의해 학살됐다”며 목격담을 들려주었다. 그는 학살 현장에 다녀온 뒤 “사흘 동안 밥을 먹지 못했다”며 당시 기억을 떠올리기조차 끔찍한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하였다.

김씨는 당시 작은아버지 시신을 찾고자 큰아버지와 함께 괭이를 들고 남창골 학살지에 직접 갔다고 했다. 낮에는 북하 경찰서에서 지켜서 그곳에 가지 못했고, 경찰 눈을 피해 야음을 틈타 개천을 타고 남창골까지 갔다고 하였다.

학살지에 다다랐을 때는 부패한 시신 냄새가 진동해 도저히 접근하기 힘들 정도였다. 시신 썩은 내를 계속 맡다보니 코가 헐어 코피가 입으로 흘러내렸다고도 하였다.

김 씨 증언에 따르면 경찰들은 남창골 평지에 네 개의 커다란 구덩이를 파서 입산자나 부역혐의자 등을 트럭으로 수차례 실어다가 손을 뒤로 묶은 채로 그 구덩이에 집어넣고 사살하였다. 그 뒤 경찰들은 그 구덩이에 가시덤불을 넣고는 흙을 덮어버렸다. 경찰들은 유족들이 시신을 가져가지 못하게 지키기도 하였다.

이 와중에도 많은 유족이 그곳에 찾아와서 구덩이 속 시신들을 파내 늘어놓은 뒤 가족을 찾는 작업을 하였다. 하지만 당시는 한 여름 7월이라 시신들은 이미 부패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구덩이 밖에는 그들의 신발(짚신과 고무신)들이 무수히 널브러져 있었다. 시신 악취에 코피가 흘러내리고 허연 뼈들이 나뒹구는 시신들 속에서 작은아버지를 찾기란 도무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김씨는 큰아버지에게 작은아버지 시신 찾기를 단념하고 “그만 집으로 가자”고 설득했다. 그제야 큰아버지는 작은아버지 가슴 양쪽 옷섶에 무명 헝겊조각을 댄 사실을 알려줬다. 그것을 표식으로 하여 그들은 겨우 시신을 찾아냈고 그 부근에 가묘를 한 뒤 나중에 묘를 이장하였다.

김씨는 “당시 시신을 찾으러 온 사람 중 많은 이가 가족을 분간할 수 없어 시신을 끝내 못 찾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더욱이 현재 남창골 집단 학살지에는 마을이 들어섰고 그 흔적을 찾아볼 수조차 없게 됐다.

이 집단학살로 대방마을을 비롯한 그 주변 여러 마을 사람들의 제삿날이 같다고 한다. 김복수씨는 작은아버지 시신을 수습한 뒤 얼마 안 지나서 논에서 일하던 중에 군대 영장을 받아 6.25 전쟁에 참전해 싸우다 만 3년 만에 제대하였다.

한편, 진화위는 지난 2008년 하반기 조사 보고서의 ‘제2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1)’ 편에서 ‘담양 장성지역 경찰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818~890쪽)을 다룬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1949년 7월 3일부터 1951년 8월 사이 경찰 및 경찰토벌대에 의해 전남 담양·장성지역 최영초 등 주민 57명이 ‘통비분자’, ‘부역자’, ‘입산자,’ ‘그 가족’이라는 등의 이유로 희생됐다. 그 중 10명은 여성이고 10세 이하 어린이는 4명이다.

이들의 ‘희생경위’를 살펴보면 ‘인민군 점령기 부역 혐의자일 것’이라는 추정만으로, 심지어 ‘빨치산에게 양식을 탈취 당한 일을 하루 늦게 신고’해서, ‘오빠를 부역혐의로 사살한 사실을 항의한다’는 이유 등으로 살해하기까지 했다.

진화위는 보고서에서 “이 조사결과는 담양·장성지역 경찰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의 일부에 해당하는 것이지 지역 전체의 희생자 수는 아니다”고 밝혀 놓았다. 지금까지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가 57명일 뿐이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희생자가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신기철 전 진화위 조사관이 정리한 장성지역 (민간인 희생)사건자료를 살펴보면 1950년 7월 12일 장성 북상면(현 북하면) 남창골에서 국민보도연맹 관련자 400여 명 중 일부가 장성 경찰서에 의해 희생됐다고 나온다.

하지만 도표에 나오는 희생 장소가 ‘원덕리 갈재 정상’으로 표기돼 있어 북상면 남창골의 희생자 규모는 파악하기 힘들다. 또한 김복수씨의 증언에 의하면 남창골 집단 학살사건은 ‘국민보도연맹원’과 상관없는 ‘빨치산’ 관련자들의 집단학살이라 별도의 사건일 가능성이 있다.

국회는 지난 5월 20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 개정안'(과거사정리기본법)을 제정하였다. 이에 따라 오는 12월에 2기 진실화해위가 출범할 예정이다.

정병진 기자 naz77@hanmail.net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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