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없는 사람?”4.13 총선 김성진 후보 인생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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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진

4.13 국회의원선거 인천 ‘남구 을’에 출마한 정의당 김성진 후보(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단일후보)가 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쓴 글에 사람들이 감동하고 있다.

“어머니 없는 사람?”으로 시작된 김성진 후보 글은 부모 없이 자란 어린 시절부터 최근 정치인으로 나서기까지의 심정을 담은 내용이다.

김성진 후보가 글은 올리자 여러 사람이 이 글을 공유하고 또 댓글을 달며 김 후보를 응원했다.

조자영 “아…. 눈물나네요. 어느 대단한 위인전에 나오는 분인 줄 알고 끝까지 읽었는데…. 역시 제 선택은 위대했네요^^”. 이상헌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이 가슴을 저미어 오면서 눈시울을 적십니다. 이런 인생 역정을 살아오신 지 미처 몰랐습니다.” 등

다음은 김성진 후보가 페이스북에 쓴 글 전문이다.

“어머니 없는 사람?” 나 혼자 손을 들었다.

“아버지 없는 사람?” 또 손을 들었다. “아버지, 어머니 둘 다 없는 사람?” 나는 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교실이 갑자기 웃음바다가 되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나중에 담임선생님이 따로 불러 미안하다고 했다. 괜히 눈물이 났다.

겨울철 교실 난로 위에 친구들의 ‘양은 도시락통’이 부러웠다. 나의 점심시간은 언제나 수돗가여야만 했다

쉰 나이에 나를 낳고 어머니까지 돌아가시고 뿔뿔이 흩어진 형제들의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사업에 실패했는지 둘째 형은 고물장사를 시작했다. 손수레 한가득 고물을 실어 오는 날은 뿌듯했고, 비어서 오는 날은 시무룩했다. 형 몰래 시작한 신문 배달. 형이 저쪽에서 손수레를 끌고 오는 것을 보고 얼른 숨었지만, 형이 나를 보았는지, 그날 형은 혼자 소주를 들이켜며 밤새 흐느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니 집이 오간 데 없어져 버렸다. 철거된 집은 얼기설기 쌓여 있었고, 형도 찾을 수 없었다. 방범초소에서 무릎을 껴안고 잤다.

하필이면 공동학군을 배정받아 수유리에서 신촌에 있는 고등학교까지 통학해야 했다. 아무리 버스가 북새통이라지만, 회수권 없이 탔다가 차장누나에게 번번이 망신을 당하였다. 고등학교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감리교 신학대학 원서를 샀다. 믿음이 부족해서일까 잠이 많았던 나는 평생을 새벽 4시에 일어나 새벽기도를 할 자신이 없었다.

장학금을 많이 줄 것 같은 인하대학교에 원서를 넣었고 합격했다. 이제 조금만 더 고생해서 졸업하면 되었다.

대학교에 입학하던 1980년, 예수를 만났다. 중학교도 못 가고 가족들을 건사하기 위해 평화시장 매캐한 좁은 다락방에서 밤새워 재봉틀을 돌리던 시다들. 그 어린 여동생들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 주고도 더 내어 줄 것이 없어 자신을 불사른 전태일. 서른셋을 산 예수보다 더 짧은 스물두 살의 나이에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고 1970년 11월 13일 돌아가신 예수.

5월 어느 날, 광주에서 한 장의 유인물이 전해졌다. 많은 시민이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어 가고 있으며, 거적에 쌓인 시체들이 널려 있다는 고립된 광주. 아무런 죄도 없이 총검에 난도 당한 우리의 예수.

목사를 꿈꾸었던 내가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 해 1980년.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철컥. 철컥. 철컥. 시뻘건 붉은 방에서 의자에 꽁꽁 묶어 놓은 채, 수사관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내 관자놀이를 겨냥하고 빈 권총을 쏘았다.

얼굴에 물을 쏟아붓는, 또다시 시작되는 물고문. 이미 탈진 상태였던 나의 입에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름이 술술 나오고 있었다. 다음날 바로 옆방에서 귀에 익은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서빙고라 불리는 보안사령부. 따뜻한 봄날이었음에도 지하 유치장은 한없이 추웠고,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나는 몇 번이고 죽으려고 시도했다.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목숨이지만 그러나 부지하고 말았다.

복학한 1984년, 인하대학교는 온통 최루탄 범벅이었다. 학생들은 연일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외쳤고, 수도 없이 끌려가 구속되었다. 숭의동 로터리에서 나도 잡혀갔다.

그렇게 민주주의는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더딘 걸음으로 나아갔다.

‘쾅’하는 굉음과 함께 온 시민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 봉재산 미사일 오폭 사건 얼마 후 문학산에 패트리엇 미사일 기지가 들어선다는 소식이 날아들자, 시민들이 나섰다.

미사일 기지가 아니라 인천의 발원지, 문학산이 시민의 품에 돌아와야 한다며 서명운동을 하고 인간 띠 잇기와 등반대회를 줄기차게 벌여 나갔다.

국방시설을 건드린다고 더러는 빨갱이라 손가락질하기도 했는데, 지난해, 문학산 정상은 50년 만에 개방되었다. 그렇게 시민들의 품으로 문학산이 돌아왔다.

수인선 지상 건설 계획이 발표되었을 때도 시민들이 나서 삼보일배까지 하면서 계획을 변경시켰다.

칠순, 팔순 먹은 노인네들을 상대로 최루탄이 날아왔다. 덕적도 주민들은 생전 처음 맞아 보는 최루탄 가스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인천의 보석 같은 섬, 굴업도에 핵폐기장이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한 덕적면 주민들의 몸부림에 대한민국 정부는 이렇게 대응했다.

주민들과 학생들이 구속되었다. 덕적 주민 김계월 할머니는 엄동설한의 집회와 농성에 참여하시는 도중 유명을 달리하셨다. 1995년 12월 정부는 굴업도가 활성 단층 위에 있다는 이유로 핵폐기장 지정 고시를 철회하였다.

20년의 세월이 지나 덕적도 주민들이 그때 그 싸움으로 구속된 학생들을 찾아 감사패를 전달했다.

온전히 모든 것을 다 바칠 수는 없다 해도 51%는 이웃을 위해 살자.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보살이기보다 드러나지 않지만 어느 곳이든 존재하는 여래로 살자. 혹여라도 우리 인생이 역사의 점 하나로라도 기록되기 바라지 말자.

젊은 날 우리는 이렇게 맹세했다.

그러나 나는 오늘 무엇인가 되고자 한다. 모든 문제가 정치에서 비롯되고 누군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시장 출마 세 번, 국회의원 출마 두 번, 한 번도 당선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졌어도, 우리가 이기기도 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시장 후보를 양보하고 야권 연대를 성사시켰다. 그 결과, 야권 단일 후보인 송영길 인천시장 후보가 당선됐다. 남동구와 동구에서 수도권 최초로 진보정당 구청장이 탄생했다. 남구에선 진보정당 정수영 후보가 시의원에 당선됐다.

누군가의 희망이 되고, 누군가의 꿈이 된다는 것은 벅찬 일이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이 뒤따르는 것이라면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선거는 함께 꿈을 꾸는 것이다. 꿈꾸는 세상을 함께 현실로 만드는 일이다.

그 꿈을 향해 두렵고 떨리는 이 길을 다시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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